[서울갈램] 대한독립만세! 3·1절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탐방

봄 기운이 완연하여 제법 따뜻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봄을 알리는 따뜻한 기운에는 가슴 아린 쓸쓸함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삼일절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유니스타그램 친구들은 3·1절을 맞아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탐방에 나섰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가는 길

서대문형무소는 옛날 서울에서 평양,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는 출발지라고 할 수 있는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고갯길인 무악재에 위치해 있습니다. 가는 길은 쉽습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 .

젊음이 아름다운 나사로 같은 유니스타그램 친구들은 언제나 시민의 발이 되어주는 고마운 지하철을 애용하기에 어렵지 않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이용하신다고요? 걱정마세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바로 맞은 편에는 크고 넓은 주차장이 있으니 자동차를 타고 오셔도 주차 걱정없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su_box title=”독립공원 주차장 주차요금” box_color=”#774d7c”]
[소형차] 5분: 150원 / 1시간: 1,800원
[대형차] 5분: 450원 / 1시간: 5,400원
(카드전용 주차장으로 신용,직불,체크카드, 티머니 사용가능)[/su_box]

[su_box title=”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주소” box_color=”#774d7c”]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 독립공원[/su_box]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를 나오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가는 길을 표시한 표지판이 바로 보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표지판을 따라 쭉 올라가다 보면, 낡고 붉은 벽돌의 건물이 보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어디서 많이 본듯 하시나요?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교도소 출소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붉은 벽돌의 교도소가 바로 이곳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관람안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입구 맞은 편엔 관람안내도가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현재 그 일부만이 보존되어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어머니 시화전 관람 이후 전시 판넬을 꼼꼼히 읽는 습관이 생긴 유니스타그램 친구들은 매표소에 들어가 표를 끊기 전 안내 문구를 읽으며 어떤 마음으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관람을 해야할 지 생각해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su_box title=”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관람안내” box_color=”#774d7c”]이곳 서대문형무소는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고, 목숨까지 빼앗기면서 고난을 당했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현장입니다.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침략과 광복 이후 독재정권 집권이라는 고난의 역사를 극복하고, 세계역사상 유례 없는 독립과 민주화를 이루어낸 대한민국의 저력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입니다. 이에 서대문구에서는 보안과청사와 옥사, 사형장, 망루, 담장 등 일제강점기 건물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과거를 반성하고, 전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알리기 위해 지난 1998년 11월 5일 이곳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개관하였습니다.[/su_box]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su_box title=”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box_color=”#774d7c”]옛 서울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에 일제가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다. 옛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처음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는데,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등으로 바뀌다가 1967년에 서울구치소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애국시민, 학생들이 투옥되었고, 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 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이후 4.19, 5.16, 군사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1987년에 옛 서울구치소를 경기도 의왕시로 옮길 때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다. 이 가운데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제9~13옥사, 나병사(癩病舍), 사형장 등을 남겨 두었다. 1988년부터 공원을 만들기 시작하여 1992년부터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부르고 있다.[/su_box]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su_box title=”서대문형무소 역사관” box_color=”#774d7c”]이곳은 일제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순국하신 수많은 애국선열의 얼과 혼이 깃든 독립의 현장이며 살아있는 역사의 터전입니다. 서대문구에서는 이곳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성지로 보전하고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승화 발전시키기 위하여 1995년 8월부터 옥사와 망루 등 각종 시설물을 보수·복원하고 일제 점령기 형무소와 관련된 유물과 문헌을 전시하는 형무소역사관을 건립하여 1998년 11월 5일에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역사적 자료가 길이 보전되어 우리 후손들에게 영원히 물려 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su_box]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관람시간 및 관람료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른 아침에 방문하면 여유로운 관람이 가능합니다. 한가지 관람 팁을 드리자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도슨트 프로그램1)을 운영하고 있는데 일요일 오후 1시와 1시 30분, 2시에  전문 자원봉사자인 도슨트 역사길라잡이 선생님들이 1시간 30분 정도 함께 형무소 곳곳을 동행하며 형무소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설명해 주신다고 합니다. 전화 예약으로만 신청이 가능하며 한국어, 영어, 일본어 등 3개 국어를 지원하고 있다고 하니 외국인과 방문할 계획이 있거나, 어린이와 혹은 친구들과 단체로 방문한다면 이용해보아도 좋겠습니다.

[su_box title=”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관람시간” box_color=”#774d7c”]
[여름철: 3월~10월] 09:30 ~ 18:00
[겨울철: 11월~2월] 09:30 ~ 17:00
[휴관일] 1월 1일, 설날, 추석, 월요일(공휴일인 경우에는 다음날)

(입장은 관람시간 마감 30분 전까지 가능)

[/su_box]

[su_box title=”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관람료” box_color=”#774d7c”]
[어 른 (19세 ~ 64세)] 개인: 3,000원 / 단체: 2,400원
[청소년 (13세 ~ 18세)] 개인: 1,500원 / 단체: 1,200원
[어린이 (07세 ~ 12세)] 개인: 1,000원 / 단체: 800원
[무 료] 6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및 국가유공자(장애인 수첩 및 국가유공자증 소지자에 한함)

(단체 관람은 20인 이상이며 사전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시 대기 시간이 길어질 수 있음.)[/su_box]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이 된 옛 서대문형무소 보안과 청사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가면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입니다. 이 곳은 옛날 서대문형무소의 보안과 청사 건물입니다.

‘보안과 청사’는 1923년 지어진 건물로 1층은 사무공간, 2층은 회의실과 소장실, 지하는 취조실, 휴게실로 사용된 서대문형무소의 중심 건물입니다. 원래 청사 중앙부만 2층이었으나, 1959년 좌우측을 2층으로 증축하면서 전체 외벽에 백색타일을 붙여 본래의 모습이 훼손되었는데, 2010년 보수·정비시 백색타일을 제거하고 원형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그래서 그런지 벽면에는 회색 시멘트 자국이 붙어 있었는데요, 이것은 백색 타일을 떼어낸 흔적이라고 하는군요. 현재 이곳은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숙연한 마음으로 전시관의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침략의 서막, 을사늑약

서대문형무소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전시되어 있는 것은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채결된 을사늑약문입니다. 을사늑약문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우리나라를 식민지화시키기 위해 강제로 채결하였던 문서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대부분 어릴 적엔 을사늑약이 아닌 을사조약이라고 배웠을텐데요, 사실은 ‘조약’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조약이던 늑약이던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같은 한 날을 두고 표현한 최후의 만찬이라는 단어와 유월절이라는 두 단어의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 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조약이라는 것은 국가간 합의에 따라 법적 구속을 받도록 규정하는 협약이고, 늑약억지로 맺은 조약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경우엔 을사늑약이 정확한 표현인거죠.

일본은 을사늑약이 합의하에 맺어진 지극히 합법적인 ‘조약’이기때문에 우리나라를 침략한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해 아직도 사과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합의하에 한건데 왜 사과를 하냐는 말이죠. 그럼 정말 을사늑약이 국가간 합의하에 맺어진 합법적인 조약일까요? 예, 당연히 아니지요.

을사늑약은 서두에 제목도 없습니다. 제목이 없다는 것은 양국간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을사늑약은 당시 헌병과 경찰들이 둘러싼 채 맺어졌으며, 그 시간도 새벽 2시 30분경이었다고 합니다. 나라간의 중요한 합의를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채결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정상적인 조약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을사늑약은 어디를 보아도 강제 채결된 말도 안되는 늑약임이 명백합니다. 마치 2,000년 전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잡아 법정에 세우고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죄인으로 몰았던 그 사건과 같이 말이죠. 이 외에도 더 많은 스토리가 있지만, 지면상 생략하겠습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채결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 당하게 됩니다. 후에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특사2)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못하였고 1910년에 이루어진 치욕적인 국권강탈로 결국 우리민족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억압과 공포의 상징 서대문형무소

일제는 조선을 병탄하기 앞서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감옥부터 지었습니다. 국권을 회복하고자 맞서 싸우는 독립운동가들을 저지하고 탄압하기 위해서 말이죠.

서두에 언급한 서대문형무소의 지리적 위치를 생각하면 이 장소는 유동인구가 많은 도심 한복판이었을 겁니다. “너희가 독립운동을 하면, 여기에 들어갈 것이야!” 라고 겁을 주기 위해 인구가 많은 도심 한 가운데에 지었을 거라고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오고 가는 길목에서 이 흉물스럽고 무서운 감옥을 보며 당시 보통의 한국민들은 얼마나 많은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아마 먹고 살기도 힘든 시대에 보통의 한국민들에게 독립운동은 정말 그 생각조차하기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내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치욕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당했을 그 시대의 비참한 상황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래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며 무지함으로 이 모든 비참한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보통의 한국민들의 정신계몽을 위해 그 무엇보다도 교육에 힘썼던 것 같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러한 서대문형무소는 1809년 부터 1987년까지 80년 간 운영되었습니다. 그 80년의 세월 동안 34~35만 명이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대문형무소는 지어질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의 감옥들은 수감 인원이 300여 명정도였다는 것에 반해 서대문형무소는 수감 인원이 500여 명이었다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대문형무소는 세워진 목적대로 우리 민족에 대한 억압과 처벌의 장소로 이용되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수감·순국하였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러한 일제의 무서운 탄압에도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벌써 99년 전의 일이네요. 이때 일제는 닥치는대로 우리 민족을 잡아들이게 되고, 500여 명이 수용되는 곳에 민족을 대표한 33인을 비롯하여 3,000여 명에 육박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게 됩니다. 5명 정도 간신히 생활할 수 있는 옥사에 30여 명이 들어갔다니 상상할수록 끔찍합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대문형무소의 배치도는 이렇습니다. 배치도가 마치 일제의 국일기를 묘사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 구조는 서양에서 모티브를 얻어온 것으로 수감자들을 원활하게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고 합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현재는 10,11,12 옥사가 보존이 되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간수가 앉았다는 의자는 그 슬픈 역사 속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수감자들이 사용한 구멍난 고무신과 빨래방망이를 비롯한 생활도구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서대문형무소 전시관 2층 민족저항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1층 관람을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가면 민족저항실이 나옵니다.

1910년 치욕적인 강제병합

1905년 을사늑약의 서막을 시작으로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한일강제합방3)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1945년까지 일제는 총칼을 앞세워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자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인적·물적 수탈은 물론 한국민을 노예와 같이 전락시켰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그리고 일제가 우리 민족을 말살하는데 있어 혈안이 되어 가장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바로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것은 용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싸리나 대오리로 만든 둥글고 긴 통으로 본래는 술이나 장을 거르는데 사용하지만, 이곳에서의 용도는 일본 간수가 수감자를 이송할 때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얼굴의 씌우는 얼굴 가리개였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독립운동가가 잡힌 것을 알고 동요를 일으킬까봐 사용했다고 합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수갑에 연결되어 있는 굵은 쇠사슬은 그 두께 만큼이나 내 나라의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

이 노래 때문에 유관순 누나로 더 오래 기억되고 있는 유관순 열사는 3·1 운동을 전개하다 서대문형무소로 잡혀와 순국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입니다.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은 유니스타그램 친구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su_box title=”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box_color=”#774d7c”]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su_box]

이제는 유관순 누나가 아닌 유관순 열사로 제대로 호칭해야겠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 목판은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위해 사용할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해 사용된 태극기 목판입니다. 아직까지도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선명한 잉크 자국은 그 날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수많은 모자이크 타일이 아름답게 디자인 된 것 같이 보이나, 자세히 바라보면 그 당시 수감자들의 수형기록표라는 사실에 놀라게 되는 전시물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하나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 어리고 앳땐 얼굴이 많아 더욱 가슴이 아파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잔혹했던 서대문형무소 지하고문실

어릴 적에 몇 번 견학 온 경험이 있는 유니스타그램 친구들이지만, 몇 번을 와도 긴장하게 되는 서대문형무소 지하고문실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곳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을 취조했던 장소입니다. 이곳에 끌려온 독립운동가들은 취조 과정에서 견디기 어려운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su_box title=”식민지 통치수단 ‘고문'” box_color=”#774d7c”]일제는 한국민의 저항의식을 억누르고 독립운동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를 취조하면서 고문과 구타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한국인들에 대한 이 같은 폭력은 역사적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고, 정치·사상적으로도 우리보다 우수하지 못하다는 열등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민을 지배하는데 유화책을 쓰지 못하고, 무차별적인 강압과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폭력적 통치 방식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방식과 비교해 보아도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륜적 행위였다.[/su_box]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요즘같이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다소 리얼리티가 부족한 마네킹이지만, 그 당시 일제가 항일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손을 묶고 코에 물을 붓는 이 고문은 피를 거꾸로 솟게 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하며 고통을 줍니다. 이 과정에서 폐에 물이 들어차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너무 잔인해서인지 지금은 마네킹 모형이 많이 사라졌네요. 어린 소녀의 살을 인두로 지지는 고문, 두 손과 발을 묶고 송곳이나 기다란 대나무 꼬치로 손톱이나 발톱 사이의 살을 쑤시는 고문, 온통 뾰족한 못으로 뒤덮힌 상자에 가두고 흔드는 고문 등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렇게 까지 잔인한 행동을 서슴없이 행할 수 있었는지 온몸에 소름을 돋게합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지하고문실에는 관람객들이 수형도구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용수와 수갑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벽장 고문과 가시상자 고문을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곳은 독방입니다. 전시를 위해 조명을 설치했지만, 실제 조명이 없는 독방은 빛 한점 들어오지 않아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이곳에 갇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고문을 당하는 신음소리를 듣는 그 공포감은 무엇으로도 표현이 안될 것 같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유니스타그램 친구들은 이런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던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되세겨봅니다.

서슬퍼런 서대문형무소 옥사로 가는 길

서대문형무소 전시장을 나오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10,11,12옥사로 무거운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10,11,12옥사는 1922년 2층으로 지어진 옥사입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수감자가 급증하자 신축되었다고 하는군요. 이곳은 앞서 서대문형무소 배치도에서 본 것처럼 가운데 중앙간수소를 중심으로 각 옥사를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하는 파놉티콘 구조를 도입해 감시와 통제가 용이했다고 합니다.  또한 천장에는 수감자들의 움직임이 잘 보이도록 복도를 밝게 하기 위한 채광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울구치소 운영 당시 훼손되었던 것을 2010년에 보수·정비 하면서 원형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문을 들어서자마자 바깥과는 공기부터 다른 싸늘함이 감돕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처음 온 방문객이라도 관람에 불편함이 없도록 관람 안내 표지판이 잘 되어있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간수들이 머무는 중앙간수소로 추정되는 방이었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일본 간수 마네킹이 앉아서 반겨줍니다. 유니스타그램 친구들은 다함께 흠짓 놀랍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나라 잃은 슬픔에 억울한 옥살이까지 해야만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옥중 생활이 얼마나 처참하였는지 전시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읽어보았을 백범일지의 1947년 활자 초판과 독립운동가 김규만 선생의 옥중일기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su_box title=”김구 백범일지” box_color=”#774d7c”]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 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구, 가슴뼈 부러진다.”라고 야단이다. 하지만 미는 쪽에서는 또 누울 자리가 생기니, 서 있던 자가 그 사이에 드러눕고 몇 명이든지 그 방에 있는 자가 다 누운후에야 밀어주던 자까지 다 눕는다. 모말과 같이 네 귀퉁이를 물려 짜서 지은 방이 아니면 방이 파괴될 터였다. 힘써 밀때는 사람의 뼈가 상하는 소리인지 벽판이 부러지는 것인지 우두둑 소리에 소름이 돋는다.[/su_box]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재소자들의 하루 일과가 적힌 동작시한표입니다. 이 곳에선 주로 벽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끔찍한 고문과 더불어 하루에 단 30분을 쉬며 벽돌을 만드는 고역을 추운 겨울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끝없이 해야만 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안내 표지판에 따라 옥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무겁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2층 구조이지만, 건물이 워낙 낡고 오래되었기에 훼손의 염려가 있어 2층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2층엔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옥사을 둘러보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함께 2층를 올려다보니 금방이라도 뛰어 내려와 잡을 것 같은 눈빛을 한 일본간수가 유니스타그램 친구들을 무섭게 바라보네요. (깜.놀.)

옥사마다 1월부터 12월까지 매달 기념해야 할 이 달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자세히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봄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날씨임에도 옥사 내부는 한 겨울처럼 추웠습니다. 바닥은 얼음장같이 차가웠으며, 벽은 너무나 두꺼웠고, 창문은 너무나 높았습니다. 2평 남짓한 이 곳에 2~30명이 수감되어 살았으니 한 여름엔 또 얼마나 더웠을까요. 화장실도 없어 옥사 내부에서 해결해야 했던 그 상황을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참으로 잔인하고 잔혹했습니다.

이런 곳에 잡혀와야 했으니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정말 생각조차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정말 목숨을 바쳐야만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고, 이런 옥중에서도 오직 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만을 외치며 일제의 그 어떤 가압과 끔찍한 고문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이 이 곳에 담겨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향한 그 뜨겁고 간절한 사랑이 있었기에 후대의 우리는 자유 대한민국에 살게 되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 잊고 지내지만, 절대 잊어선 안될 우리 나라의 아픔을 잘 보관해주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탐방이었습니다. 이번 탐방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굳건히 다져봅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대한민국 현실이 마치 지옥과 같다하여 ‘헬조선’이라 부르기도 한다는군요. 하지만,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대한민국은 형장에서 꺼져간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생명으로 찾아진 것임을, 그 분들이 그토록 소원하던 나라임을 말이죠.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비록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들로 다소간의 아픔이 있지만, 언제나 감사함을 잊지말고 함께 힘을 내요! 우리 민족은 연합하기만 하면 어떤 기적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슈퍼파워족이잖아요. 더욱 연합하고 화합하여 어제보다 오늘 좀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요! 우리나라의 미래는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요.

대한민국 만세!

하늘독립 만만세!

 

[참고]

  1.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도슨트 프로그램 신청: 02-360-8586
  2. 헤이그특사
  3. 한일강제합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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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갈램] 대한독립만세! 3·1절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탐방”의 1개의 댓글

  • 2018년 3월 1일 7: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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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독립 운동을 이끌어 가시는 엘로힘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 독립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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